2008년 3월 3일 월요일

[徐氏] 達城徐氏 가문을 빛낸 인물들의 이야기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의 증손(曾孫) 균형(鈞衡)이 1360년(공민왕 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신 돈(莘 旽)의, 방탕한 횡포를 탄핵하는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고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그의 아들 침(沈)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침(沈)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문한(文翰)은 승사랑(承仕郞)으로 광흥창 부승 (廣興倉副丞)을 거쳐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차남 문간(文幹)은 중시(重詩)에 올라 역시 현감을  역임했고, 막내 문덕(文德)은  숙부(叔父)인 송화 부사(松禾府使) 습에게 출계(出系)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만경 현감(萬頃縣監)을  지냈다.
 
대사간 충(衷)의 증손 한정(翰廷 : 진사 균의 아들)은 세종(世宗) 때 진사(進士)로 태학(太學)에서 학문(學問)을 연구하였고,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영주 이산면 한성동(榮州伊山面漢城洞)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다가 소백산(小白山) 밑 순흥(順興)으로 옮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연구에 진력하며 스스로 호(號)을 돈암(遯庵)이라 불렀다.
 

한편 임진왜란 때 중봉(重峯) 조 헌(趙 憲)의 휘하로 들어가 금산(錦山)의 전투에서 칠백 의사(義士)와 함께 순절한 응시(應時)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떨쳤던 사원(思遠)은 청안 혐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 외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아 주사장(舟師將)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었던 인충(仁忠)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화의(和義)를 반대했던 변이 유명했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에서 선봉수문장(先峰守門將)으로 임명되었던 후손 수천(壽千)은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노량 해전(露粱海戰)에서 무공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서화(書畵)에 탁월하여 <팔능(八能)>으로 일컬어졌던 병오(丙五)와 독립운동가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상일(相日)이, 영친왕(英親王) 결혼식전에 참석했던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살해를 기도하다 피체되었던 상한(相漢 : 상일의 아우)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목렬(穆烈)의 아들 재승(在承 : 종사랑  진의 12세손)은 일찌기 유학(儒學)에  전념하여 시(詩)와 예학(禮學)에 정통했으며 효성(孝誠) 이 뛰어나 세인(世人)들의 칭찬을 받았다. 1905년(광무 9) 통사랑(通仕郞)으로 탁지부 주사(度支部州事)이 되었으나  일본(日本)의 침략흉계에 의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해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앞장섰으며, 군자금(軍資金) 조달을 위하여 고향인 영주(榮州)로 내려가 활약하다가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도중 영풍군 풍기읍(榮豊郡豊基邑) 창락동에서 일본 헌병과 격투하다가 40세로 순절하였다.
그후 그의 충절(忠節)을 기려 사림(士林)에서 충의(忠義)라 사시(私諡)하였고, 1980년 8월 14일 대한민국건국포장(大韓民國建國褒章)이 수여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죽림(竹林) 재승(在承)의 장손(長孫) 병극(丙極)이 전국 사림의 공의(公議)에 의하여 사업비(事業費) 일체를 전담하여  경북 영풍군 단산면 사천리(慶北榮豊郡丹山面沙川里)에 백산서원(白山書院)을 건립하여 전사청(典祀廳)을 비롯한 부속건물을 세우고 경내(境內)의 조경(造景)과 진입로 공사를 완료하여 선조(先祖)의 위패를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