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3일 월요일

[徐氏] 관학계(官學界)를 대표한 문형(文衡)

  이른바 역사상 명문(名門)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요인이 쌓여서 형성된 것이지만, 특히 그 가문에서 배출한 정승의 수보다는 문형이 얼마나 배출되었느냐가 명문을 따지는 유력한 기준이 된다.
  정승(相臣:三議政)은 국정을 총괄하는 지위인만큼 어느 가문에서 정승이 배출되면 그 문중의 세력이 신장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력있는 가문이 꼭 명문일 수는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이다.
   에 비해 대제학은 비록 정1품인 정승보다 한급 아래인 정이품(正二品)의 관계(官階)이지만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이 뛰어나고 가문(家門)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碩學) 석유(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地位)로써, 학자(學者)와 인격자(人格者)로서의 최고지위(最高地位)라고 할 수 있어 어느 가문에서 대제학이 배출되면 당대는 물론 그 후손들도 최고의 영예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렇게 평가해 주었던 것이다.
   문형(文衡)이라면 흔히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제학(大提學)이라도 문형(文衡)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나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兼任)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나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한 사람이라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나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兼任)하지 못한 사람은 문형(文衡)으로 칭하지 않았다.
  이들 3관(館)의 벼슬은 학문과 문벌이 높은 사람으로서 임용되는 이른바 청환직(淸宦職)이어서 다른 어떠한 관직보다도 비중이 컸던 것이다.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경연(經筵:왕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일)을 맡았는가 하면 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관으로, 흔히 "옥당(玉堂)"이란 별칭으로 불리었다.
  한편 예문관은 제반 외교문서를 포함한 왕의 칙령과 교명(敎命)을 맡았으며,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국학인 유학을 교육하는 기관이엇다. 따라서 이들 3관은 어느 다른 관청보다도 중요시 여겼다.
  문형(文衡)은 바로 이들 3관의 최고책임자이자 실무자로서 당대의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리였다.
  문형은 역대 왕조실록의 편찬에 반드시 참여했으며, 또 과거를 주재하고 문신의 과시(課試)와 상벌, 외교사절의 접반, 각종 경적(經籍)의 편찬과 출판을 관장했는가 하면 왕세자의 입학에 박사(博士)로서 그 의식을 주재하기도 했다.
  이렇듯 문형(文衡)의 소임은 다양하고 광범해서, 일대(一代)의 유림(儒林)과 사원(詞苑)이 모두 문형의 통할에 귀속되었다. 따라서 문형의 자리를 최고의 영예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형(文衡)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은 첫째로 문과 출신으로서 예문관 관원(官員)이 되기 위한 사관시재(史官試才) 또는 한림소시(翰林召試)라는 채용시험에 합격하거나, 홍문록(홍문관 교리.수찬을 선거 임용하는 기록)에 뽑혀야 한다. 둘째로 반드시 호당(독서당=賜暇讀書)을 거쳐야 했다. 세째로는 반드시 예문관 응교(應敎)와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역임한 사람이어야 했다. 응교와 제학은 그 자격 및 임용 규정이 까다로와서, 반드시 장래 문형이 될만하다고 인정되는 재학(才學)과 명망있는 사람으로서 임용되었다.
  위와 같은 요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반드시 누구나 다 문형(文衡)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형의 임용은 반 드시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하면, 이를 삼정승(三政丞). 좌우찬성(左右贊成) .좌우참찬(左右參贊). 육조판서(六曹判書) 등이 모여 권점(圈點)을 해서 결정했다. 권점이란 후보자의 이름 아래에 점을 찍는 것으로 지금의 비밀 투표나 마찬가지였다. 권점(圈點)으로 뽑는 방식은 다른 청환(淸宦)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문형(文衡)은 반드시 전임자가 천거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점이 특수했다.
  일단   문형(文衡)이 되면 본인(本人)이 사 임(辭任)하지 않는 한 그 지위가 보장되는 것이 통례여서, 비록 죄를 짓거나 상(喪)을 당한다 해도 죄에서 풀리거나 상을 마친 뒤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문형으로서 상신(三議政)에 임명되면 후임자를 추천하고 문형직을 사임하는것이 통례였는데, 다만 신숙주. 어세겸. 이행. 김안로. 성세창. 유성룡 등은 정승이 되어서도 문형을 겸직했었다.
  역사상 3대(三代)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은
연안이씨 "월사(月沙)집"의 이정구(李廷龜). 이명한(李明漢). 이일상(李一相),
광산김씨 "사계(沙溪)집"의 김만기(金萬基). 김진규(金鎭圭). 김양택(金陽澤),
달성서씨 "약봉(藥峰)집"의 서유신(徐有臣). 서영보(徐榮輔). 서기순(徐箕淳),
전주이씨 "백강(白江)집"의 이민서(李敏서). 이관명(李觀命). 이휘지(李徽之) 등 네 집뿐이었다.
한편 부자(父子) 대제학연안이씨의 이복원(李福源). 이만수(李萬秀), 전주이씨의 이진망(李眞望). 이광덕(李匡德), 창녕성씨의 성현(成俔). 성세창(成世昌), 덕수이씨의 이식(李植). 이단하(李端夏), 안동김씨의 김수항(金壽恒). 김창협(金昌協), 의령남씨의 남유용(南有容). 남공철(南公轍), 해주오씨의 오원(吳瑗). 오재순(吳載純) 등 일곱 집이고, 형제 문형광산김씨의 김만기(金萬基). 김만중(金萬重) 형제와 여흥민씨의 민점(閔點). 민암(閔암) 형제뿐이다.
  그러니까 연안이씨의 "월사집"은 3대 대제학에 부자 대제학 등 6명의 문형(李鼎輔<이정보>)과 상신(相臣) 6명(李廷龜.李天輔.李福源.李性源.李時秀.李在秀)을 배출했고,
  달성서씨의 "약봉집"에서는 3대 대제학을 포함하여 5명의 문형(徐宗泰.徐命鷹)과 3대 상신을 포함한 9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또 광산김씨의 "사계집"에서는 3대 대제학과 형제 대제학 등 7명의 문형(金益熙.金永壽)과 3명의 상신(金相福.金陽澤.金熹)을 배출했다.
  또한 전주이씨 밀성군파의 "백강집"에서는 3대 대제학과 6명의 상신을 배출했으니 단일 가계로서는 대단한 열력(閱靂)이라 하겠다.
  역대 문형134명 가운데 35%인 47명이 상신에 올라 높은 승진율을 보이고 있으며,그밖의 문형들도 좌.우찬성(左.右찬成) 이나 보다 높은 품계(品階)로 올름으로서 문형 출신들의 높은 승진율을 엿볼 수 있다.
  역사상 최초로 문형에 오른 사람은 안동권씨의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며, 최연소의 나이로 문형에 오른 사람은 광주(廣州)이씨의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으로서 31세의 나이로 문형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문형을 여러차례 중임한 이로는 광산김씨의 김양택(영조조)과 장수황씨의 황경원(黃景源=영조조)이 다섯번을 중임하는 기록을 세웠고,
  덕수이씨의 이식(李植=인조조), 전의이씨의 이덕수(李德壽=영조조), 해주오씨의 오재순(吳載純=정조조), 청송심씨의 심상규(沈相奎=순조조), 안동김씨의 김조순(金祖淳=순조조)이 각각 네번을 중임했다.
  이밖에 이더형. 오도일(吳道一=해주인). 송상기(宋相琦=은진인). 윤순(尹淳=해평인). 이병상(李秉常=한산인). 이정보(李鼎輔=연안인). 이휘지(李徽之=전주인). 서명응(달성인). 김종수(金鍾秀=청풍인). 홍양호(洪良浩=풍산인). 이만수(李晩秀=연안인) 등이 세번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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