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씨제도(姓氏制度)는 원래 왕가(王家)에서만 사용하다가 차츰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퍼진 것으로서, 우리 나라는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왕족에 한하여 성씨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후 삼국시대(三國時代) 고구려의 주몽이 고씨(高氏), 백제의 온조가
부여씨(扶餘氏), 신라의 혁거세가 박씨(朴氏)를 성씨로 사용했다는 기록을 전한다.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씨의 기원은 단군시대(檀君時代) 예국(穢國) 軍葬(君長)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衆人邊)을 부쳐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한다.
기록에 따르면, 기자(箕子)의 40세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 나라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라 하였다고 한다[魏志 東史綱目].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및 행주기씨(幸州奇氏) 등이 있다. 서씨로서 이름을 떨친 이는 신라(新羅) 때의 개국공신 아성(阿城) 대장군(大將軍) 서두라(徐豆羅)가 있었다.
서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 말기에 아간(阿干)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이다.
서씨사적정해(徐氏 史蹟精解)에 따르면, 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 40살에 사슴의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날,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느껴 왕의 눈에 들어 만주에게 서씨(徐氏)의 성을 내리고 뒤를 보살펴
줌으로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徐神逸)로 고쳤다고 한다. 오늘날 이천서씨(利川徐氏)는 모두 그의
후손이며, 달성(達城), 연산(連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남양(南陽) 등 7개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모두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고 한다.
한편 고려초기에 서목(徐穆) 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 이 남정(南征)할 때 태조를 받들어 인도하여 한천(漢川)에 이르러 대천(大川) 큰 냇물을 잘 건너게 했다는 공로로 이천백(利川伯)의 봉작(封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달
성서씨(達城徐氏)는 이천서씨(利川徐氏)에서 분관(分貫)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내력을 명확하게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천서씨
문헌에 서희(徐熙)의 아들 4형제 중 서주행(徐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설이 있을 뿐이니 막연하기 한이 없다.
이천서씨에서 분관된 달성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 향파(鄕派)로
나누어졌는데, 조선 숙종(肅宗) 28년 서기 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두 파의
의견충돌이 심하여, 결국 영조(英祖) 대에 이르러 서기 1736년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서씨(大邱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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